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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타/미켈란젤로 부오나르티

1498~1499년, 대리석, 174cm × 195cm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

 

 

들어가며

 르네상스 시대의 가장 유명한 예술가 중 한 명인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는 대리석에 생명을 불어넣는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수많은 걸작들 중에서 피에타는 그의 기술과 비전에 대한 놀라운 증거입니다. 미켈란젤로가 겨우 20대였을 때 만들어진 이 형태는 고뇌와 은혜의 가슴 아픈 순간을 포착합니다. 이 블로그는 피에타의 창조 이면의 설득력 있는 이야기, 그것의 정의적 특징, 그리고 이 상징적인 작품을 둘러싼 역사적이고 예술적인 맥락을 탐구합니다.

 

피에타의 탄생

 1498년, 미켈란젤로는 로마의 산피에트로 대성당에 있는 그의 무덤을 아름답게 하기 위한 작품을 만들려는 프랑스 추기경 장 드 빌레르에 의해 피에타 제작을 의뢰받았습니다. 그 당시, 미켈란젤로는 꽤 젊은 예술가였지만, 그의 재능은 이전에 상당한 관심을 끌기 시작했습니다. 추기경의 의뢰는 미켈란젤로가 형식을 통해 심오한 감정과 전문적인 숙달을 표현하는 그의 능력을 보여주는 도전이었습니다. 정작 미켈란젤로는 주문자가 계약 완료 시점보다 이전에 사망하는 바람에 보수를 제대로 지불받지 못했습니다.

 

피에타의 구성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특별한 완벽함으로 유명합니다. 카라라 대리석의 한 블록으로 조각된 이 형태는 자연주의적인 세부 사항을 만들기 위해 매체를 조작하는 미켈란젤로의 비할 데 없는 능력을 보여줍니다. 마리아의 가면을 쓴 군중의 복잡한 그림, 예수의 몸에 있는 빛과 그림자의 섬세한 상호 작용, 그리고 인간의 해체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는 각각 이 형태의 자연주의적인 외관에 기여합니다. 대리석처럼 지속되는 것처럼 매체에 유사한 세부 작업을 만드는 미켈란젤로의 기술은 그의 문화적 천재성의 증거입니다. 상징과 구성 피에타의 구성은 균형과 조화의 현상입니다. 미켈란젤로는 마리아의 머리가 꼭대기에 있고 그녀의 옷과 예수의 뻗은 팔로 인해 넓어지는 밑부분이 형성된 피라미드 구조를 선택했습니다. 이 배열은 구조적인 안정성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방관자의 측면을 지시하기도 합니다. 자연스럽게 마리아의 고요한 얼굴과 예수의 숨 가쁜 모습을 향해 나아갑니다. 미켈란젤로가 의도적으로 선택한 마리아의 미성숙한 모습은 그녀를 늙고 더욱 애처롭게 여기는 전통적인 표현과는 달리, 그녀의 정조와 영원한 부성을 상징합니다. 피에타는 인간이 아닌 하느님에게 보여드리기 위한  작품이기 때문에 90도 각도 위에서 내려다보면 신체 비율이 완벽하게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또한 예수의 완벽한 근육 묘사는  조각으로 이렇게까지 조각한 미켈란젤로의 천재성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성모마리아의 얼굴은 예수보다 젊게 묘사되었는데 어머니가 아들보다 젊은 게 말이 되냐는 비판이 있었습니다. 이에 미켈란젤로는 제자 아스카니오 콘디비(Ascanio Condivi, 1525~1574.12.10)에게   '순결한 여자들이 순결하지 않은 여자들보다 젊음을 더 잘 유지하는데, 티끌만큼도 추잡한 욕망의 때가 묻지 않은 육체를 가진 동정녀라면 말할 것도 없다'라고 이유를 밝혔다고 합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가 특별한 이유 중 하나가 그가 남긴 수많은 조각 중에서 그의 서명이 남아있는 유일한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성모마리아의 어깨띠에 "MICHAEL·ANGELVS·BONAROTVS·FLORENT·FACIEBAT(피렌체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만들었다)"라고 새겨져 있는데 당시에 성당을 장식하는 업무는 엄연히 상업작가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상당한 물의를 빚기도 하였습니다. 피에타가 대중에게 처음 공개됐을 때 사람들이 롬바르디아 출신의 2류 조각가가 만들었다고 하자 미켈란젤로는 그 말에 화가 나 밤중에 몰래 성당으로 들어가 자신의 이름을 새겼는데, 그날 성당을 나서는 길에 본 황홀한 밤풍경에 "하느님께서도 이런 아름다운 작품에 당신의 이름을 새기지 않았는데 내가 이런 짓을 하다니"라고 깨달아 뒷날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서 다시는 자신이 만든 작품에는 서명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피에타의 피해

피에타가 격은 최악의 피해는 1972년 5월 21일 헝가리 출신의 호주인 라슬로 토트(Laszlo Toth / Tóth László)에 의해 행해진 훼손입니다. 그는 본래 지질학을 전공하던 지질학도였는데 호주에 이민을 가 공부를 했으나 영어에 능숙하지 못했고  학위도 취득하지 못해 비누공장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정신질환을 앓게 되었고 그로 인해 자신이 재림 예수라는 망상을 갖게 됩니다. 결국 그는 1971년 오직 교황(바오로 6세)을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로마로 가서 알현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합니다. 이후로 망상은 심해지고 예수 그리스도가 못 박힌 나이로 추정되는 33살이 되자 극에 달합니다.결국 그는 1972년 5월 21일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가서 "내가 그리스도다"라고 외치며 무려 15회를 내리쳐 파손해 버렸습니다. 떨어져 나간 파편은 당시 현장에 있었던 관광객들이 일부 가져갔으며 절반 가량은 찾았으나 성모마리아의 코는 완전히 망실되어 등으로부터 떼어 내어 복원했습니다. 복원과정을 살펴보면 대리석 가루와 조각을 붙인 접착제는 폴리에스테르 수지를 사용했고, 절단된 팔 부분은 산화 방지 철근을 끼워 넣어 몸체와 접합시켰습니다. 또한 1749년 피에타를 지금의 자리로 옮길 때 깨져서 절단면을 갈아 붙였다가 1972년에 다시 깨진 손가락 부분은 최초 조각 당시의 길이와 관절의 모양을 확인하는 게 불가능해 대리석보다 가벼운 재료를 사용해 복원 사실이 드러나게 처리했습니다.이 사건의 범인인 라슬로 토트는 너무나 명백한 정신질환자였기 때문에 법적처분은 받지 않고 2년 동안 치료감호 처분을 받아 병원에서 지내다가 호주로 추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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